이상화 시인은 1901년 현 대구 중구에서 태어났다. 7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큰아버지 이일우가 그의 가족들을 돌보았으며, 위로는 독립운동가인 형 이상정, 아래로 마찬가지로 독립운동가인 이상백, 이상오가 있었다.
1915년 상경 경성부 중앙학교에 입학하였으나 3년후 자퇴하고 강원도 일대를 방랑하다 일제에 대한 민족 저항시 '신라제의 노래'를 발표하였다.
1922년 현진건의 소개로 <백조>동인이 되어 나도향, 홍사용, 박종호 등과 친하게 지내면서 창간호에서 '말세의 희탄', '단조', '가을의 풍경' 등을 발표하였다.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 1923년 외국어전문학교 등을 수료하였고, '나의 침실로'를 발표하였으나, 관동대지진 때 조선일들이 무차별 학살되는 것을 보고 3월에 귀국, 경성부 가희동의 취운정에 머물며 시 짓기에만 전념하였다. 1924년 고향 친구가 죽자, 추모시 '이중의 사망'이라는 시를 지었고, 같은 해 김기진 등과 무산계급 문예운동단체, '파스큘라'를 결성하였다.
1925년 천도교기념관에서 '파스큘라'가 개최한 문예강연 및 시낭독회에서 '이별을 하느니'를 낭독하였고, 같은 해 카프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이 당시만 해도 그의 시경향은 퇴폐주의에 해당하는 편이었다고 한다. 1926년 잡지 <개벽>에 대표작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하면서 신경향파으로 전화되는 경향을 보였다.
1928년 독립운동자금 마련 위한 'ㄱ당 사건'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가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이 시기 그는 자택 사랑방, '담교장'에는 수 많은 항일독립운동 인사들이 출입하곤 했다.
그 이후에도 그는 '대구행진곡', '초동', '역천', '나는 해를 먹다' 등을 발표하였다. 1936년 형 이상정 장군을 만나 독립 위한 국내조직을 협의했는데 이듬 해 체포되어 2개월간 구금당하며 심한 고문을 받고 나서야 석방되었다.
이후에도 1941년 잡지 <문장>에서 '서러운 해주'를 발표하였으나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4월 25일, 부인과 세 아들이 지켜보는 중에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그의 친구 소설가 현진건도 1943년 별세하였다고 한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무덤은 대구 도시철도 1호선 대곡역 3번출구 200m 정도의 거리에 있다고 한다.
출처 : 위키백과
오늘은 민족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를 포스팅 할려고 합니다. 이 시에 나오는 '들'은 실제 배경이 수성못 북쪽의 지금 지명으로, 수성구, 상동, 중동, 두산동, 황금동 일대에 있던 너른 들이었다고 한다. 상동, 중동, 두산동을 지나는 길 이름도 이상화의 이름을 딴 상화로이며, 달서구 대곡동, 상인동에도 상화로가 있다.
이렇게 수성못 입구쪽에 상화동산이 있으며, 이상화 시인을 기리는 여러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상화 시인의 동상과 큰 바위에 새겨진 빼앗긴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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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 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털을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1926년 <개벽>
왜 포스팅 제목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가 아니라 '빼앗긴 들에 봄은 왔는가' 로 했을까요? 1943년에 광복이 온 것을 확인하지 못하고 눈을 감은 이상화 시인이라면 이렇게 묻지 않을까?
또 우리는 과연 광복된 조국에 우리 자신을 위해, 우리 아이들을 위해, 우리 가족을 위해, 그리고 우리 이웃을 위해 진정한 봄을 이 땅에 가져왔는지 묻고 싶다.
요새 자주 산책으로 수성못을 걷는다. 찍어두었던 일몰 사진으로 이번 포스팅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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