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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지혜 생활

[헤르만 헤세 명언] 사랑은 증오보다 고귀하고, 이해는 분노보다 높으며, 평화는 전쟁보다 고귀하다.

by 늙은둥이 2023. 4. 24.

헤르만 헤세,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그는

독일계 스위스인 문학가이자 예술가이다.

대표작으로는 [데미안],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수레바퀴 아래서], [나르시스와 골드문트], [황야의 이리] 등이 있다.

 

데미안은 철학적인 깊은 성찰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를 향하는,

한 존재의 치열한 성장을 보여준다.

 

마지막 작품인 유리알 유희로서

1946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 새는 새로운 세상에 나오기 위해 알의 껍질을 깬다. 그 알이 바로 그 새의 기존 세상인 것이다. 그처럼 우리도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세상을 깨고 나와야만 한다.

 

 사랑은 증오보다 고귀하고, 이해는 분노보다 높으며, 평화는 전쟁보다 고귀하다.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행복하며, 사랑하는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아름답고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을 바라는 생활은 위험하다. 그 사람이 스스로 충만 되어서 나에게서 떠난다고 해도 그 사람을 위해 기도드릴 각오없이 사랑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일이다.

 

 사랑이란 애걸해서도 안 되고 요구해서도 안 된다. 사랑은 자신 속에서 확신에 이르는 힘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사랑은 결코 이끌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끄는 것이다.

 

 사랑이란 슬픔 속에서도 의연하게 이해하고 미소지을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

 

 사랑은 우리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우리들의 고뇌와 인내 속에서 얼마만큼 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자신에게 보이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사랑을 하는 것이야말로 행복이다.

 

 세상에는 단 하나의 마술, 단 하나의 힘, 단 하나의 행복이 있을 뿐이고, 그것은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우리들에게는 사랑 그 자체로서 충분하다. 마치 목적을 두지 않고 방랑 그 자체의 즐거움을 바라는 것처럼.

 

 원하는 것이 없는 사랑, 이것이 우리 영혼의 가장 높고, 가장 바람직한 경지이다.

 

 그대가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한, 그대는 언제까지나 행복해지지 못한다. 그대가 소망을 버리고 이미 목표도 욕망도 없고 행복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 때에야 세상의 거친 파도는 그대 마음에 미치지 않고 그대의 마음은 비로소 휴식을 안다.

 

 행복만을 바라보고 쫓아가는 한 너는 행복을 누릴만큼 성숙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사랑스러운 것이 네 것이 된다 하더라도, 잃어버린 것이 아까워 한탄을 하고 목적을 가지고 초조하게 애쓰는 한, 아직 평화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목적도 욕망도 다 버리게 되었을 때, 행복, 행복하며 이름 붙여 바라지 않을 때, 그 때에 비로소 세상만사의 흐름이 너의 마음에 부딪히지 않게 될 것이며, 너의 영혼이 안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행복하다는 것은 소망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순간의 목적을 위하여 자기자신을 버릴 수 있는 마음, 여성의 미소를 위하여 매년 희생할 수 있는 마음, 그것을 행복이라고 부른다.

 

 행복이란 ‘어떻게’이지 ‘무엇’이 아니다.

 

 나의 천성적인 우울한 습성을 고쳐서 나의 청춘시절을 다치지 않고 신선하게, 새벽처럼 유지시켜준 것은 결국 우정뿐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이 세상에서 남자들 사이의 성실하고 훌륭한 우정만큼 멋진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언제가 고독할 때에 청춘에의 향수가 나를 엄습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학창시절의 우정 때문일 것이다.

 

 명성이나 좋은 술, 사랑이나 지성보다도 더 귀하고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것은 우정이었다.

 

 인간이 육체를 가진 이상 애정은 언제나 필요하다. 그러나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성장케 하는 데는 우정이 필요하다.

 

 

 잠자리에 들기전, 하루를 검토하라. 그것이 하나님 뜻에 합당한 것이었는지 아니었는지를. 양심과 성실이라는 점에서 기뻐할 만한 일이었는지를. 불안과 회한처럼 무기력한 것은 아니었는지를.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르라. 증오와 부정을 고요히 고백하라. 모든 악한 것의 중심에서 부끄러워하라. 어떤 그림자도 침상까지 가져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 모든 근심을 마음에서 제거해버려라. 영혼이 오래 편안하도록 하라.

 

 중요한 일은 다만 자기에게 지금 부여된 길을 한결같이 똑바로 나아가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의 길과 비교하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기도는 음악처럼 신성하고 구원이 된다. 기도는 신뢰이며 확인이다. 진정 기도하는 자는 원하지 않는다. 단지 자기의 경우와 고뇌를 말할 뿐이다.

 

 고통에서 도피하지 말라. 고통의 밑바닥이 얼마나 감미로운가를 맛보라.

 

 사람은 고통을 통하여 자기를 잊어버리는 길을 걷는다. 사색을 함으로써 자기를 던지는 길을 걷는다.

 

 큰 일에는 진지하게 대하지만 작은 일에는 손을 빼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 몰락은 언제나 여기에서 시작된다.

 

 고독은 곧 독립을 뜻한다.

 

 말로 갈 수도, 차로 갈 수도, 둘이서 갈 수도, 셋이서 갈 수도 있다. 하지만 맨 마지막 한 걸음은 자기 혼자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구 한 사람 아는 이 없는 곳에서 사는 것은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모든 인간의 생활은 자기자신에의 길이며, 하나의 시도이다.

 

 우리의 삶이 밝을 때도, 어두울 때도, 나는 결코 인생을 욕하지 않겠다.

 

 운명은 친절하지가 않고, 인생은 변덕스럽고 냉혹하였다.

 

 인생은 고독, 그것이다. 왜냐하면 인생은 남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인생은 모든 의미와 의의가 상실되었을 때 비로소 가장 의미 깊은 것이 된다.

 

 우리들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 불필요한 노력을 하곤 한다. 하지만 때때로 일이 흘러가는 대로 놓아두는 편이 좋을 때가 있다.

 

 만일 우리가 죽음을 삶의 위대하고 영원한 형태의 하나로서 인정한다면 죽음은 우리의 동의하에, 우리가 그에게 대답한다면 우리에게 감미롭게 다가올 수 있다.

 

 모든 예술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일깨워 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예술가에게  더 없는 위안이 된다.

 

 인간은 각자 모두 자신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 완전히 자신의 작품이며 자신의 것인 생활을 창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자기의 운명을 짊어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자만이 영웅이다.

 

 용기와 인격, 둘을 다 겸비한 사람은 타인들에게 따분한 존재로밖에 보여지지 않는다.

 

 사람은 용기와 인격으로서 나머지 생의 불운을 예측할 수 있다.

 

 부르주아들은 즐거움보다는 안락함을 좋아하며, 자유보다는 편리를 추구한다. 그리고 치명적인 내면의 활활 타는 불꽃보다는 쾌적하고 안락한 환경을 좋아한다.

 

 어린 아이에게서 배워라. 그들에게는 꿈이 있다.

 

 단어 없이, 글 쓰기 없이, 어떠한 책 없이, 세상에 역사도 없었을 것이고 인류의 철학과 인간성의 개념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의 의미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혼돈을 따르면서도 순서와 목적에 따라서 신념을 여전히 지켜야만 한다.

 

 말로 생각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는 없다. 말은 표현하고 나면 그 즉시 다소 달라진 표현이 되곤 한다. 약간 왜곡되기도 하며, 다소 어리석은 표현이 되기도 한다.

 

 영원은 순전히 한 순간일 뿐이며, 다만 농담을 위해서는 충분하다.

 

 우리가 변화시킬 수 있는 것, 그리고 변화시켜야만 하는 것은 우리를 자신이다. 곧 우리의 성급함, 이기주의, 쉽게 등을 돌리는 것, 사랑과 관용의 결여 등이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는 경우, 그것은 단지 그의 모습을 빌려서 자신의 속에 있는 무엇인가를 미워하는 것이다. 자신의 속에 없는 것은 절대로 자기를 흥분시키지 않는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만 배우고, 나머지는 웃어 넘겨라.

 

 진리를 사랑하기를 배우고, 진리를 생명의 불가결한 요소로서 느끼기 위해서는 비상한 각오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인간은 뭐니뭐니 해도 피조물이고, 진리와는 철저하게 적으로서 상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란 것은 사람이 원하는 그런 것이 아니고 언제나 무정하고 냉혹한 것이다.

 

 진리는 살아있으며, 우리를 길들이지 않는다.

 

 그곳에 그렇게 내가 믿어 온, 우리가 깨달을 수 없는 어떤 존재가, 모든 사물의 본질에 있었다. 그곳에, 모든 시공간과 사물에 깃든, 내 친한 친구인 지식과 진리가 있었다.

 

 진실이란 무엇이냐, 또는 인생은 본래 어떤 식으로 짜여져 있는냐 하는 것은 각자가 스스로 생각해내야 하는 일이지, 책 따위에서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내면에 살아있는 유일한 존재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진실도 없다. 그것이 수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이유이다. 그들은 현실을 위해서 그들 외면의 모습만을 잡으려 애쓴다. 그리고 세계는 결코 그들에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우리가 진실된 삶을 살아가면서 갖게된 지혜만이 오직 값비싼 가치를 지니고 있다.

 

 광기를 다스리는 최선의 방법은 제 정신인 것처럼 시치미를 때는 것이다.

 

 모든 자살은 자살의 유혹과의 싸움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다. 그들 각각의 사람들은 자살이 열등하고 초라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라기 보다는, 비록 어떤 희망이 있었음에도 그들의 영혼이 구석에 몰렸을때 이루어짐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죽음은 그 스스로의 손에 의해 행해지는 것보다는 자연스런 삶에 의해서 정복되는 것이 귀족적이며 숭고하고 훌륭한 죽음이다.

 

 지성인은 국제적이며 초국가적이다. 지성인은 전쟁과 소멸이 아닌, 평화와 조화를 위해서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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